침묵이라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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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의 홍수에서 살고 있다. “잘 알면 세 마디로 족하다. 잘 모르니 서른 마디가 필요한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입을 다물 수가 없어서 말을 할 때가 많다.”
- 암브로시우스, 교회학자
세상에는 쓸데없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방송마다 똑같은 뉴스를 반복하고, 스마트폰은 쉬지 않고 울려대며, 버스에서는 쉴 새 없이 라디오가 돌아간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이 입 밖으로 낸 것보다 더 많은 뜻을 전달할 수 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이 입 밖으로 낸 것보다 더 많은 뜻을 전달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정이 상하면 즉시, 반사적으로, 생각 없이 대꾸하고, 언쟁은 점점 심해진다.
“말이 많은 사람은 할 말이 적은 겁니다. 제가 진짜 두려워하는 상대는 침묵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속을 알 수가 없거든요. 포커판과 같습니다. 자꾸 떠들다 보면 자기 패만 들키게 되지요.”
침묵도 소통의 방식이다. 말과 침묵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래서 말과 침묵의 균형이 중요하다.
잔잔한 물이 더 깊다.
말이 적으면 똑똑하고 교양 있고 유능하며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실제로는 어떻건 간에 말이다. 거기에 미소까지 보태지면 20%는 더 지적으로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이라 부른다. 안경을 끼면 더 지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침묵은 이해와 동의를 표하는 강력한 방식이다
떠들기만 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못 듣는다. 그리고 보았듯이 그런 장광설(쓸데없이 길고 지루하게 늘어놓는 말)의 대가는 너무 비싸다.
“헛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도 안 하는 편이 낫다”는 선인들의 지혜를 따른 것이다.
법정에 서는 모든 피고인에게는 묵비권이 있다.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은 증언은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다. 이 또한 침묵이다.
법정에서조차 사용될 정도로 침묵은 유익한 것이다.
보통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할 때 더 힘이 든다. 그러나 침묵은 반대다. 수다는 쉽지만 침묵은 힘들다.
침묵에는 지성과 관심, 굳은 의지와 동기,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몸에 익고 나면 끊임없이 떠드는 것보다 입을 다무는 쪽이 훨씬 편하고 쉽다.
이쯤 되면 떠들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야 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으니까.
남의 말을 들으려면 입을 다물고 TV와 스마트폰을 끌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점점 침묵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관종’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떻게든 엄마의 관심을 끌려는 어린아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어 끊임없이 말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린다.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타인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주의가 날로 심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별 관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용한 방 안에 홀로 있지 못한다. 차라리 집을 짓거나 파트너와 싸울지언정, 심지어 전쟁을 할지언정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은 절대 못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수학자 파스칼Pascal이 괜히 이런 말을 했겠는가.
“인간의 모든 불행은 오로지 방 안에 조용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 구두나 스마트폰, 큰 차가 아니다. 멋진 물건을 갖는 건 좋은 일. 하지만 그것들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내게 휴식을 주지도, 나를 성장시키지도 못한다.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해주지도 못하며, 나쁜 생각을 떨쳐주지도 못한다. 이런 부분은 침묵 그리고 마음과의 대화로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완벽주의에게 이렇게 말하라. “아직은 완벽하게 못 하지만 조금만 연습하면 잘할 수 있어.” 실패의 두려움에게는 이렇게 말하라. “괜찮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지.” 자신과 대화를 할 때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상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대화법이 필요하다.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져도 좋다.
“너 자신을 알라.”
자신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타인과의 관계도 만족스럽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냉혹하게 굴거나 스스로 생트집을 잡지는 말자.
인간으로서 삶을 조금이라도 편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면 상대의 욕망을 읽는 법을 익히는 것이 좋다. 배우자든 아이든, 부모든 친척이든, 직장 동료든 고객이든, 우리는 어쩔 수없이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니까 말이다.
최고의 대화는 스톱-고(stop-go)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내가 추천하고 싶은 말과 침묵의 비율은 각각 1:3이다. 침묵이 말보다 3배 더 길어야 한다.
스위스 기차에는 ‘휴식 열차’칸이 있었다. 그 칸에서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도 쓸 수 없고, 아이는 들어오지 못하며, 라디오나 워크맨도 일체 금지였다. 조용히 쉬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거나 책을 보거나 창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명상의 결과는 항상 놀랍다.
평소 명상을 하는 사람은 명상을 하지 않을 때에도 혈압이 낮고, 긴장을 덜하며, 심근경색 위험이 절반에 불과하다. 혈액검사 결과도 더 좋다. 미국에는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들을 명상만으로 치료하는 병원이 있다.
스트레스에 대한 보통의 반응은 도주 아니면 전투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는 더 빨리, 더 집중해서 일을 한다.
온갖 핑계를 대며 고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들이미는 가장 흔한 이유가 바로 “명상을 하면 나쁜 생각이 더 많이 들어요”다.
혹시 ‘나쁜’ 생각과 느낌이 치밀어 오르는가? 그냥 내버려둬라. “그래, 정말 불쾌해. 그래도 그냥 내버려둘래.”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은 고요한 휴식이 아니기에 힘을 주지 못한다. 휴식 속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 힘이 있다.
예전에는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쉴 수밖에 없었다. 강요된 리듬이었지만 그 덕분에 일과 휴식을 건강하게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심지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며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한다. 현대판 노예들은 휴식은 꿈도 꾸지 못하고 일과 휴식의 리듬을 완전히 까먹는다.
세상이 쉬지 않고 스트레스를 준다면 우리 스스로 쉼표를 찍고 일과 휴식의 리듬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입을 다물고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지금껏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라며 놀란다. 하지만 일단 한번 생각해보면 멋진 아이디어가 샘솟을 것이다. 아래에 몇 가지를 제시해보았다.
1. 엘리베이터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말고 마음을 집중하라.
2. 마트 계산대에서 줄 서 있을 때.
3. 신호등에서 대기할 때
4. 컴퓨터 부팅할 때
5. 자동차 시동을 켜기 전에(스트레스를 가득 안은 채 도로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 )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직장에서 생긴 스트레스는 직장에 두고 가자.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언젠가는 깨끗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고통에 맞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맞서다보면 그토록 바라던 대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과묵한 지혜가 꼭 나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나이와 관계없이 남들이 떠들 때 입을 다물 줄 아는 사람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상황에서는 즉시 대답하기보다 잠시 멈추어야 한다.
학자들은 참가자들에게 “그날의 힘든 사건에 대한 당신의 가장 깊은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오늘 사장이 나를 무시해서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힘들다.” 이렇게 자신의 고통을 글로 기록하면 마음이 가벼워질 뿐 아니라 질병의 증상이 사라지고 자존감과 행복도가 높아진다.
감정을 솔직하게 글로 적으면, 앞선 실험의 지시대로 ‘가장 깊은 감정과 생각’을 글로 옮기면 수박 겉핥기식 수다를 넘어 진정으로 아프고 힘든 감정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다.
예전 사람들은 고요의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아침 기도 시간을 가진 것도 그런 이유다.
자기관리가 잘되는 사람들은 하루 2~3번, 정해진 시간에만 이메일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일의 효율이 오를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안정된다. 이런 차분함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만 한다.
에너지는 고요의 샘에서만 길어낼 수 있다.
그리고 직관은 고요에서만 깨어난다.
삶의 의미는 번잡한 소음이 아니라 고요한 순간에 드러난다. 고요함 속에서만 평온과 휴식, 안정과 행복, 자존감을, 특히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다.
말을 많이 할수록, 세상의 소음에 귀를 내줄수록 점점 자기 자신을 잃게 된다.
고요는 많은 것에 도움이 된다. 에너지와 창의성, 직관적 문제 해결을 돕는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고요가 인성의 발달을 돕는다는 점이다.
괴테가 말했다. 가장 큰 행복은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인성이라고.
하지만 괴테가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인성은 고요한 순간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