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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물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은 어느 쪽에 속한다 고 봐야 할까? 물인가, 불인가. 아니면 물도 불도 아닌그 무엇인가.
사랑은 물의 감정인 동시에 불의 감정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사랑은 때론 우리의 마음을 한없 이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들면서도, 때론 더없이 뜨겁고 단순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나.
단언하건대 사랑은 무엇이든 쌓을 수 있고 무엇이든 무 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운
동전의 양면이 시간상의 차이를 두지 않고 같은 때에 눈앞에 펼쳐질 순 없지 않나. 그러나 현실에선 행운과 불운이 동시에 다가오는 순간이 얼마든지 있다. 좋은 운수에 그렇지 않은 요소가 묻어 있거나 불행 속에 행복의 씨앗이 심겨 있는 경우는 그야말로 비일비재하다.
행운과 불운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해변에 밀려 드는 각기 다른 모양의 파도가 아닌가 싶다.
복잡하게 뒤엉킨 행운과 불운이 한꺼번에 닥쳐올 때, 우 리가 어느 한쪽으로만 걸음을 옮기며 그것을 실제보다 더 크게 느끼는 것뿐, 그리하여 행운이라는 파도에 다가 갈수록 불운을 외면하고 반대로 불운의 물결에 뒤덮일수 록 행운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어쩌면 우린 머리와 마음에서 운이라는 모호한 세계를 걷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행운과 불운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고, 어 쩌다 운이 밀려와도 필요 이상으로 들뜨지 않을 수 있으 며, 하루아침에 운이 떨어져나가더라도 지나치게 낙담하 지 않을 수 있다.
한마디로, 운에 집착하지 않아야 운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운은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죽을 때까지 박혀 있는 나무가 아니다.나무에 앉아 땀을 식히고 깃털을 고르는 한 마리 새와 비슷하다.
운은 날개를 퍼덕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닌다.
흔히들 삶을 강물에 비유한다.
둘은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돌이킬 수 없다.
하류로 떠내려간 강물은 상류의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 하고, 이미 벌어진 일은 아무리 후회해도 절대 없던 일이 될 수 없다.
강물도 삶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강물 위에서 일렁 이는 바람은 잔잔하다가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거 세진다. 그러면 덩달아 물살도 사나워진다.
흐름을 예측하기 어려운 건 삶도 매한가지다. 자신의 미 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저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가면 좋을 텐데'라는 식으로 원하는 바를 머릿속으 로 그리면서 다들 앞날을 다짐할 뿐이다.
또한, 강물과 삶을 구성하는 재료가 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강물은 맑은 물과 탁한 물이 한데 뒤섞여 커다란 물줄기 를 형성해 힘 있게 내뻗친다.
삶도 그렇다.
우리가 사랑하는 게 아니라 때론 서럽게 여기는 것이 우리를 인생의 하류로 실어 나른다.
삶을 살아 가게끔 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가장 커다란 고통을 주는 사람과 사건이 결과적으로 내 게 가장 커다란 통찰력과 분별력을 안겨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이를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홀로
이처럼 다른 사람과 함께 겪을 때 그 경험의 의미와 크기가 확장되는 행위가 있다. 그런 일을 혼자 하면 재미가 반감된다. 감흥이 확 식어버린다.
반대로 혼자 경험해야 능률이 오르고 즐거움 또한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일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미 걸어간 길을 답습하기보다 나만의 길을 찾아야 하 고, 이를 위해선 인파로 북적이는 큰길에서 벗어나 때로 는 아무도 없는 샛길로 접어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삶이라는 항해 속에서 남보다 멀리 나아가려면, 결국엔 남 이 아니라 내가 일으킨 파도에 올라타야 한다.
우린 정체를 알 수 없거나 자기보다 압도적인 것과 마주 하는 순간 두려움을 느끼곤 한다.
낯설고 거대한 대상 앞에서 불안한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은 죽은 사람뿐이다.
불안의 농도를 묽게 만들기 위해 우린 다양한 방법을 동 원한다. 어떤 이는 불확실한 존재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어 떤 이는 불안으로 물든 마음에, 타인에게서 건네받은 위 로와 응원을 한가득 쏟아붓는다. 후자의 경우 누군가가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버팀목 삼아 힘든 시기를 버티곤 하지만, 그런 말을 끝내 듣지 못하면 낙담과 실의 의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서 듣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말이 귀로 흘러 들어오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두려움 의 농도를 묽게 만들거나 아예 밖으로 내쫓을 수 있다.
듣고자 하는 말을 귀로 끌어들이는 방법과 수단이 저마 다 다를 뿐이다.
교환
부모와 자식 간에 주고받는 것들
선천적인 요소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각자의 마음에 남겨지는 무수한 삶의 흔적, 상처와 고통이 내면에 쌓이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정제성이 형성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어쩌면 우린 지난날 남과 다른 상처를 얻었기 때문에 지 금 이 순간 남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지 모른다.
돌이켜보건대, 기쁨이나 성취감 같은 것이 내가 나아가 야 할 인생의 좌표를 알려준 경우가 없진 않았지만,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타인과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하게 해주진 않았던 것 같다. 오직 마음에 가장 깊게 새겨진 은밀한 상처만이 날 특정한 방향으로 걸어가게끔 하는 '삶 의 나침반'으로 작용했다.
언제나 그랬다.
사실 모든 사람은 질투의 보균자다.
질투의 감정을 품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남들 앞에서 잘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질투는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이다. 질투는 입구를 찾기 는 쉽지만 출구가 헷갈리는 건물과 비슷하다.
제아무리 타고난 기질과 성정이 온화한 사람일지라도 질 투에 휩싸이게 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평정심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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