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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아무튼 클래식

by lionbum 2024. 11. 23.

요즘 종종 찾아 읽고 있는 아무튼 시리즈.



아무튼, 클래식
“그 속의 작은 길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겪은 순간들을 꽤 소중히 여겨왔다”

음악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건 역시 예술 가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녹음기를 들이밀면서 자, 저는 당신 이야기를 글로 써서 세상에 널리 전할 겁니다 하는 기자 앞에서 말을 고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일하면서 만난 예술가 대부분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한 곧은 태도를 분명 하게 전달할 줄 알았다.

조리 있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데는 서툴더라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예술가가 지닐 만한

삶의 뭉툭한 부분과 뾰족한 부분을 구분 하고 인정할 줄 알았다.
자신감과 자만, 겸손함과 졸렬함을 헷갈리지 않는 성숙한 사람들이었다.




음악은 실체가 없다.
그림이나 소설처럼 손에 쥐고 기뻐하거나 좋아할 수가 없다. 말로 기억하며 감흥을 나누는 데 한계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인 듯하다.
색감이 좋다거나 구도가 좋다거나, 등장인물이 어떤 행동을 해서 그게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언어로 붙잡아둘 수 있는 요소가 턱없이 부족하다.  
몇 악장 어느 부분이 좋았다, 연주자의 호흡이나 표현이 훌륭했다 말할 수는 있지만 이미 흘러가 버린 음악을 머릿속에서 더듬는다.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이면서 자유롭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꽤 오래 그랬다. 질투 같은 부정적인 의미는 모두 빼고 정말로 순수하게 부럽다.
나와 비슷한 시대 풍경을 성장 과정으로 삼고도 클래식 음악을 하며 사는 용기에 대한 존경심, 내가 가지지 못한 타고난 재능에 대한 본능적 관심, 같은 걸 좋아한다는 괜한 친밀감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인다.

피아노가이즈. 존슈미트
이들의 비디오, 오디오 작업 중 내가 가장 좋 아하는 건 콜드플레이의 〈파라다이스〉를 나이지리아 가수 알렉스 보예와 함께 연주하는 '페포니 (Peponi)' 뮤직비디오다. 그랜드피아노와 첼로를 헬리콥터로 들어 올려 미국 유타주의 절벽 꼭대기에 올려 두고는 완전히 새로운 개성을 입은 장엄한 <파라다이스>를 들려준다.

그들을 인터뷰했을 때 나는 리메이크 음악가의 한계가 있지는 않은지 물은 적이 있다. 그들이 보낸 답신에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셰이크 잇 오프(Shalke It Ot)〉의 가사가 쓰여 있었다. 한국어로는

'사람들이 뭐라 하든 계속할 거야, 멈출 수 없어, 내 안에 음 악이 있으니 괜찮아' 같은 내용이다.
우리 팀의 목적은 처음부터 행복이었어요.



아도르노는 들어 즐겁기만 한 가벼운 음악'과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진지한 음악'을 구분하며 위계 짓기를 시도한다.
아도르노의 주장은 불성실한 학자들 탓에 '가벼운 음악=대중음악', '진지한 음악=클래식 음악 으로 이해되고 전파되어왔다. 사실은 가벼운 음악의 시장을 지향하는 음악', '진지한 음악=창작자 내면에 침잠하는 음악'이 맞다.

그러니 클래식 음악이어도 시장을 지향하고 있으면 가벼운 음악, 대중음악 영역으로 분류되어도 듣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내면 깊숙한 곳에서 흐르는 소리를 적고 노래한다면 그건 진지한 음악이 된다.

사회학자이자 미학자였던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 작곡가를 꿈꾸기도 했다. 그래선지 감상자 스스로 분별력을 가지고 좋은 음악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며 종종 분개했다. 제대로 된 관객이라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다 마치고 완벽하게 준비한 후에 한눈팔지 말고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음대 입시를 준비할 때 그래도 화성학(theory of harmony) 문제는 곧잘 풀었다. 표지가 누리끼리한 백병동 저 『화성학』 교재를 앞에서부터 천천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푸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화음(chord)을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할지, 어떻게 음을 연결할지는 수학 문제 풀 듯 기본 공식만 잘 알아두면 얼마든 적용하고 응용해 착실한 학생이 될 수 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 음악대학을 준비하는 수준에서는 작곡 과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성의 '옳은' 진행을 배워두었으니 보기 좋은 흐름으로, 적당한 길이로 완성해 내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안에서 멜로디를 짓는 능력이나 변주의 참신함, 그 외 여러 음악적 표현력을 평가 기준으로 삼겠지만, 일종의 밑그림 같은 걸 바탕에 그려두고 시작하는 셈이다.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의 자서전 『류이 사카모토,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맨 앞 장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유치원생 꼬마 류이치는 한 반 아이들끼리 돌아가면서 토끼를 돌보는 체험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살아 있는 동물을 받아든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토끼들이 먹을 풀을 챙겨준다. 그러고는 이런 숙제를 받는다.

"토끼를 길러보니 어땠나요? 그때의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보세요."
류이치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멜로디를 적히 쓰고 토끼의 눈은 빨갛다는 식의 가사를 붙였다


나는 뭐랄까, 약간 기가 막혔다. 곡을 쓴다는 건 이런 거구나. 꼬마 류이치가 한 경험을 나는 대학 에 입학할 때까지 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의 재료는 어떤 법칙이나 공식이 아니라 추상적인 생각, 구체적인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작곡이란 작곡 공식을 배워 적용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 혹은 감각이어야 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대학에 들어가 불행히도(!) 현대 사조의 음렬 주의를 배우게 됐다. 서구 중심의 음악 관습을 깨부 수려는 20세기 혁신가들 덕에 나는 그럭저럭, 사실 은 엉망진창으로 대학 생활을 이어갔다. 이제껏 배 운 모든 이론은 몽땅 내다 버려라, 최대한 귀에 낯설 고 어렵게 음 조직을 만들어 그걸로 곡을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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